전체 거리 1.8km / 도보 약 25분 소요
원님들이 강릉부임을 하면 대관령을 울고 넘어 ‘원울이재’가 있었다. 그리고 홍제동엔 원님들의 선정비를 주민들이 많이 세워줘 비석거리가 있었으며 홍제원과 공제마을이라는 지명이 지금도 남아있다. 특히 남대천변은 혼불문학상 수상작인 박혜영의 <비밀정원>을 비롯한 작가들이 이곳에서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의 이야기를 많이 기록할 만큼 연인님들이 애정하던 거리였다고.
거리 1km / 도보 약 15분 소요
홍제동은 강릉의 관문으로 조선시대 역참인 홍제원이 있던 곳이다. 강릉의 관문 역할을 했던 곳이기에 이곳이 역사 속 강릉의 랜드마크 였으며 강릉을 오가는 사람들이 모두 이곳을 거쳐 갔을 터이다. 또한 이웃하여 읍성길도 있으며 힐스테이트, 한신휴플러스, 남문삼익 등 아파트단지가 강릉의 젖줄인 남대천을 바라보고 있는 전망 좋은 동네이다. 특히 홍제원은 과거 흉년에 나눔을 실천하기도 했는데 그 동네에 노인종합복지관이 생겨 역사의 수레바퀴를 느끼게 한다.
쿠켄은 관광지의 전망대에 버금가는 전망 맛집. 둥근 유리창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멋스러운 풍경에 남대천과 대관령, 남산이 파노라마처럼 한 눈에 들어온다. 쿠켄은 원래 삼척 MBC에 근무하셨던 사장님의 아날로그 음악사랑으로 희귀 LP판 박물관에 버금갈 정도로 5천여장의 엘피판과 영화 씨디 등을 소장하고 있다. 이 곳은 원래 강릉인이라면 다 아는 옛 한국은행 앞 퓨전 레스토랑 <작은 천국>을 운영하던 사장님이 옮겨온 곳. 여전히 맛있는 돈까스와 스테이크, 파스타와 피자, 그리고 수제차 등이 스테디셀러. 이곳을 찾는 손님들의 층도 다양해 아이들 졸업식부터 학부모회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쿠켄에서는 맛이 반, 풍경이 그 중의 반, 그리고 사장님의 친근한 정이 또 절반이라 맛집 트리플이다. 아울러 이곳은 사계절 허브며 국화 등 다양한 꽃들이 만발하는 집이라 언제나 화사한 분위기는 덤이다.
강릉 수제맥주로 새롭게 자리잡은 명소. 버드나무 브루어리는 원래 강릉의 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양조장 자리였다. 1990년대까지 막걸리를 만드는 강릉양조장이 있던 곳으로 옛 근대건축물의 양식이 그대로 남아있기도 하다. 이곳에 들어가면 ‘핫해 핫해’가 절로 나올 정도로 신박하다. 대문은 커다란 나무문이며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으로 대형 브루어리 홉통이 자리하고 있으며 어두운 실내 천정은 옛 목조건물의 형태가 그대로 세월의 깊이를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무심한 듯 수십 년 된 벽돌이 중간 중간 노출로 보여지고 있어 사진 찍기 좋은 맛집. 이층엔 전면 통유리창을 채택해 옆의 오래된 건물 지붕은 물론 길 건너 오래된 풍경을 맞닥뜨리면 문래동이나 성수동 어디쯤에 와 있나 싶기도 하다. 홈브루잉을 하는 만큼 수제맥주 특유 에일의 향을 맛볼 수 있으며 특히 강릉산 맥주들의 네이밍들도 재미있다.
거리 800m / 도보 약 10분 소요
강릉의료원 자리는 영동대학의 전신인 간호전문학교가 있어 많은 나이팅게일들이 이 남대천변을 노닐며 느티나무와 남대천의 이야기를 많이 담아내곤 했다. 그 앞에 비석거리가 있었고 가운데 느티나무가 버티고 선 자리엔 하천 보가 있어 아이들은 얼음배를 타고 이곳에서 겨울나기를 하곤 했다. 생태 통섭학자 최재천 선생이 유년시절 외갓집이 있던 강릉에 방학마다 놀러와 남대천을 거닐었다고 하기도 하고 많은 문인들과 작가들이 “쎄느강‘이라 부를 만큼 강변을 사랑했다.
옛 청소년야학은 내곡다리 옆에서 1960년대 후반 나무판자집에서 시작했으나 큰 불을 만나 전소하고 고생 끝에 홍제교 옆 천변에 남의 땅을 빌려 작은 학교를 지어 이전하였다. 처음 한글문맹을 퇴치하기 위한 한글학당 과정부터 시작한 인문중고등학교가 1990년대 들어 학력인정 평생학습시설이 되었다. 이후 중등 및 고등학교 졸업장을 수여하면서 한 때 200여명의 학생들이 몰리기까지 하였으며 젊은 날 집안형편이 어려워 배움의 한을 풀지 못한 사람들에게 가뭄의 단비같은 역할을 하였다. 이후 내부사정으로 인하여 2000년대 말 폐교하면서 강릉 중앙권 야학당 하나가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루사와 매미 태풍이 왔던 2002년과 2003년, 남대천이 범람하면서 학교가 물에 잠겼을 때 많은 재학생과 졸업생 분들이 와서 자원봉사를 하던 모습들. 한글을 깨치지 못해 매일 눈물로 학교를 오가던 어른들이 한글을 깨치고 간판과 버스 행선지를 읽게 되었다고 울며 웃으며 이야기하던 때가 눈에 선하다. 강물처럼 그렇게 역사는 흘러가기 마련이다.
1980년대까지 영동대학의 전신인 강릉간호전문학교가 이곳 의료원 자리에 있었다. 미래의 나이팅게일 여대생들이 넘쳐났던 이곳이 영동대학 이전과 함께 도립병원을 거쳐 도립 의료원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원래 1913년 관립 자혜의원으로 창설되어 1919년 강원도립 강릉의원으로, 1987년 종합병원으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의료시설이 부족했던 시절, 종합병원으로 강릉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왔던 이곳. 나이팅게일 후예들의 웃음소리가 넘쳐나던 이곳의 화려했던 날들을 생각하게 될 즈음, 요양병원이 생겨나면서 세월의 무상함을 떠오르게 한다.
박태원의 경성기행문인 <소설가 구보씨의 하루>처럼 강변을 걷고 싶을 때가 있다.
강릉시 노인종합복지관 앞 징검다리를 폴짝폴짝 건너고 싶을 때가 있다. 그 길을 건널때면 딱 황순원 선생의 <소나기>에 등장하는 소년소녀처럼 유년시절의 추억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그렇게 남대천 제방길은 추억의 장소이다. 유년시절 대관령자락에서 먹구름에 저만큼 소나기가 달려오면 아래쪽으로 달음박질 하다가 어느새 소나기가 나를 넘어 쏟아져 홀딱 젖었지만 시원하게 기분 좋은 날도 있었다.
그 길을 따라 천천히 내려오다 보면 옛 새마을청소년학교 자리도 보이고, 주유소 자리도 보이고, 경방댁 맞은편 옛 남문파출소였다가 아동시설이었다가 어느 날부터 카페로 바뀌어버린 공간도 내곡교 옆자리에 그대로이다. 그리고 제방 아래쪽으로는 어르신들을 위한 체육공원도 있고, 이 즈음엔 게이트볼장도 있다. 그리고 가운데 봇살이라고 하여 제방을 가로지르는 보가 있던 자리에 느티나무가 있었다.
유년시절에 처음 만났던 그 즈음의 느티나무는 참 크고 까마득히 우람했다.(그 아래쪽으로 나란히 비석거리가 명주동 삼거리까지 이어졌었다.) 지금도 어르신들 중에 시장을 다녀오는 길에 이곳 그늘막에서 잠시 땀을 식히는 풍경을 종종 발견하곤 한다. 그렇게 나무는 사계절 우리에게 모든 것을 내어준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 자연이 좋다.
비석거리에 이름 모를 들풀들이 가득하다. 그리고 제방둑길이 바뀌며 비석거리의 명성도 희미해져간다. 비석거리는 강릉대도호부 관아를 빠져나오는 삼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과거 강릉부사로 발령받아 오는 원님들은 대관령을 넘으며 이 먼 곳까지 와 언제 돌아갈 것인지 기약 없음에 눈물 흘렸다는 대관령 ‘원울이재’가 있었으며 이곳 삼거리에 강릉을 위해 애써 주셨다는 송덕비를 세워준 주민들의 온정이 고마워 돌아갈 때 다시 못 잊어 눈물 흘리며 갔다고 한다. 비석거리엔 아이들이 타고 놀 수 있을 만큼 수 십 여개 비들이 세워져 있었으며 2000년대 중반 모두 오죽헌 경내로 옮겨가면서 그 흔적을 잊고 말았다.
강릉이 그토록 고마워했던 이들은 누구였을까? 강릉부사 함헌 선생은 과거 중국에 서 공자의 진영을 가져와 오봉서원에 모셨다고 한다. 또한 홍제동에 물난리가 많이 나 지역민들이 아픔을 겪는 것을 보고 당시 부사 김첨경이 제방을 쌓아 김공이 쌓은 제방이라 하여 ‘공제’라 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향교를 중창하거나 송담서원을 세우는 등 지역의 교육에 심혈을 기울인 부사들도 많았다고 한다. 이런 분들이 지역민들에게 실질적인 교육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조선시대를 통틀어 과거 급제자가 나머지 강원도 전체 인원보다 통계적으로 많다고 기록되어 있다. 예나 지금이나 지역민의 입장에서 지역민의 살림에 보탬이 되는 목민관들이 사랑받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