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거리 1.5km / 도보 약 22분 소요
옥천동의 삼국시대 이전부터 전해오는 예국의 옛 도읍지이다. 예국의 옛 성터도 남아있으며 이곳엔 수문리 당간지주와 대창리 당간지주 등이 그 오래된 역사의 증인처럼 남아있다.
거리 700m / 도보 약 10분 소요
도시재생의 붐을 타고 이곳에도 도시재생길이 생겨나고 있다. 라벤더와 공유카페 등이 곳곳에 자리 잡으며 새로운 이정표를 만들고 있다.
라벤더는 우리 현대사의 초입에 지어졌을 법한 모양의 양옥집을 정확히 레트로풍으로 리모델링한 카페. 옥천동도시재생사업의 첫 삽을 뜨고 아마도 처음 생긴 카페가 아닐까 싶다. 버려진 자개장롱으로 문을 달고, 창호문살로 탁자를 만들고, 벽에는 오래된 농기구나 목재 따위가 새로운 쓰임을 자랑하듯 하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2층 공간은 영화를 보거나 작은 세미나를 할 수 있는 모임공간을 배려했으며 주말 오후 ᄄᅠᆯ어지는 단풍잎을 보며 사색하기 좋은 명당이기도 하다.
소소하게 빵을 굽고, 커피를 내리고, 라벤더 은은한 허브향기를 느낄 수 있는 카페. 벽화와 예술작품들이 여기저기 전시되어 있는 이 특별한 공간은 레트로와 모던함의 중간즈음 사잇길에서 잘 차려입고 양산까지 든 개화기 여성과 모던보이 신사를 만나는 듯하다. 라벤더에 가거들랑 근사하게 사진 한 컷 그려보자.
신라시대 불교국가로 성행하던 시절, 강릉의 중심은 옥천동이었고 그 곳으로 남대천이 흘렀기에 다들 옥천동시대를 만끽하고 있었을 터이다. 마을의 중심에서 강을 향해 절집임을 알리는 당간지주가 거대한 기둥으로 서 있었고 거기에 수문이 있어서 후에 수문리로 불렀다. 구정면의 신라 5교9산 중 사굴산파 종찰로 이름 높았던 굴산사지 당간지주와 함께 강릉의 당간지주시대를 증명하기에 보물 제83호로 지정된 수문리 당간지주는 옥천초등학교 옆 골목 사이에 있다.
거리 400m / 도보 약 5분 소요
동부시장은 창해역사 유허비가 있어 진시황에 도전한 창해역사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하며 시민예술촌 부지인 옛 소금창고, 꼬막거리 등이 여행자의 발길을 붙잡는다. 가을이면 곱게 물든 은행나무에 지나치게 반하지 말 것. 거기 못 빠져나온다.
한국전쟁 후에 강릉도 폐허의 도시인지라 새로이 일궈야 할 것들이 많았다. 1960년대 재건의 바람이 불어오면서 생필품이라고 할 간장공장, 소금공장, 쌀 상회, 엿공장 등등이 동네마다 여기저기 들어섰다. 처음 얼기설기 판자집처럼 만들어 지내던 것을 벽돌을 쌓아올려 새롭게 만들기 시작한 것이 지금의 소금창고였다. 나란히 붙어있는 이 두 개의 건물은 소금창고이기도 했고 간장공장이기도 했다. 강릉사람들의 부엌살림이 되었던 이 건물이 이제 구슬샘문화창고로 거듭나도록 기지개를 펴고 있다. 그곳에서 흙을 빚어 그릇도 만들고, 소소한 부엌살림을 새로운 형태의 공예로 만든다면 강릉의 새로운 살림살이 창고가 되지 않을까 싶다.
창해는 원해 망망대해를 뜻하는 단어다. 한때 이곳이 창해군으로 불린 적도 있었고 경포해변 뒤편 송림 사이에는 물결 찰랑찰랑하는 정자라는 의미의 창랑정(滄浪亭)이 있어 그 오랜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그 창해 이름가진 천하장사가 강릉의 옛지명 예국의 고성 터전에 전해진다. 바로 창해역사(滄海力士)는 우리 전설과 민담 속에 많이 나오는 천하장사 이야기. 창해역사는 사마천의 <사기>와 <장량열전>에 장량과 함께 진시황을 처단하려다 실패한 장사로 기록되고 있으며 그가 휘두르는 쇠방망이가 무려 120근이 넘는 쇠방망이를 자유자재로 휘둘렀다고 한다. 홍직필의 <창해역사 유허기>, 홍만종의 <순오지> 등에 그의 출생이 강릉 대창리라고 적혀 있으며 강릉 대성황사에서는 오래 전부터 창해역사를 성황신으로 모시고 있고, 관노가면극의 시시딱딱이가 창해역사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이 유허비는 1991년 옥포장학재단 최종찬 이사장이 기부하여 만들어졌으며 강릉의 유명한 문화계 인사였던 김진백 선생이 글씨를 썼다고 한다. 옥천동주민센터 뒤편 옛 여성회관 옆에 서 있는데 창해역사의 이 신화적 속설이 관노가면극에까지 녹여든 것으로 봐서 실제 당대 천하장사 중의 하나가 실존했음은 사실 아니었을까? 분서갱유와 거대한 토목공사로 민심을 잃은 독재자 진시황을 처단하기 위해 동쪽나라 장사를 초빙했다는 이야기. 때로 창해역사는 흔한 옛날이야기로 치부해 버리기도 하지만 진시황이 실제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한반도를 뒤졌다는 이야기가 여기저기 전하는 걸로 봐서 완전한 허구로 치부해 버릴 일만은 아닌 듯 싶다. 예나 지금이나 난세에 영웅이 난다는 말처럼 역사는 그 시대의 강물 높이만큼 흐르기 마련이다.
동부시장은 과거 정동진이나 옥계 등 남쪽으로 향하는 교외방향 버스들의 터미널 같은 곳이었다. 시장건물은 주상복합건물로 그 시대의 상징 같은 곳이었고 이층엔 동부극장이 있었다. 오래된 떡집과 옷가게, 과일가게, 생선가게, 그리고 다양한 먹거리들을 파는 집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지금도 인근에 먹거리들 중에 강릉을 대표하는 맛집으로 손꼽히는 곳들이 많다.
어쩌다 강릉에 꼬막 맛집들이 이렇게 우후죽순처럼 많이 생겨났을까? 꼬막집들은 원해 서해가 더 성행인데 강릉의 꼬막집들은 확실히 맛으로 승부한다. 인근 고려병원이나 연세병원이 성행하던 시절, 이곳에 골절환자들이 많이 들어와 칼슘이나 칼륨, 마그네슘 등 영양식이 필요했던 터라 그런 고단백 식당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다가 꼬막집이 특화되면서 꼬막거리가 되었다지만 실상은 해물, 부대찌개, 삼계탕과 같은 보양식 등 다양한 맛집들이 즐비하다. 맛집 이어서 오래되었는지 오래되어서 맛있어졌는지 모르겠지만 오래된 맛집들이 좋다.
거리 400m / 도보 약 7분 소요
대창리 당간지주와 효자리비, 강릉역까지 이어지는 오래된 도시의 기억같은 곳. 과거 인근에 터미널도 있었고, 연분홍 거리도 있었던 곳이라 예사롭지 않은 풍경들이 많다. 반대편 중기골목 아래로는 1990년대 이후 번창한 그 때의 신도시 포남동과 조우할 수 있다. 강릉여고 옆 용지각도 고려왕조의 마지막 전설을 전하는 곳. 강릉여고는 그 용지각의 승천하는 기운을 머금고 인물이 많이 난다고. 옥가로는 신비롭다.
동부시장 뒤편에 자리 잡은 대창리 당간지주는 과거 삼국시대 이 지역이 번성했던 곳이며 대창리 였다는 유일한 증명사진 같은 곳이다. 보물 제82호로 지정된 오래된 당간지주가 불쑥 시장건물 뒤편에 고개를 내밀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더러 기와편이 발견되어 절터였음을 짐작케 하지만 아직껏 어떤 사찰이 있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더 구르다보면 다른 이름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당간지주가 이토록 많았던 것은 그 만큼 과거 예국의 고성으로 화려했던 전성기를 지냈다는 방증일 터이다.
‘청기와’라는 명칭이 말해주듯이 좋은 시절이 있었다. 사람들이 동부시장이 차고 넘치던 그 시절. 청기와는 예약을 하지 않으면 음식을 먹을 수 없었고 보통의 일반인들에게까지 예약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지역의 유지들이 독점하다시피 했던 청기와 한정식. 지금도 걸려있는 그림이나 오가는 길목에 놓여진 오래된 궤나 병풍 등이 예사롭지 않다. 가장 화려했던 시절의 기억을 가장 화려하게 갖고 있는 곳. 물론 지금도 한정식이 깔끔해 가족들의 나들이로 사랑받는 곳이기도 하다. 청기와한정식은 그 시절 동부시장의 브랜드를 나눠 갖던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다. 잘 차려진 한정식이 밥상채로 들어오던 이 집만의 특별한 서비스. 그리고 찬과 그릇 놓는 것 하나에도 기풍과 품격을 따졌던 청기와만의 스타일이 있었다.
청기와 한정식에 가면 무엇보다도 잘 구워진 조기 한 마리가 그토록 감질 맛나게 맛있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미 그 시절 신선로가 밥상위에 올려지고, 화려한 문양의 꽃이 얹혀진 후식이 딸려 나오는, 그래서 작은 것 하나에도 정성과 마음을 담았다는 청기와. 그 시절 청기와는 귀족 식당이었다.
그냥 식당이름이 메밀집이다. 지금도 그 때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오래된 옛날 함석집 같은 기와집. 돌아앉아 있어 앞에서는 귀퉁이만 보일 뿐이다. 작은 안마당이 있고 메밀집 만의 독특한 문화로 서너 개의 방에 손님이 차면 그걸로 끝이다. 딱 욕쟁이 할머니가 나오면 제격인데 입 거친 어머니가 음식 손맛은 그만이었다.
강릉 특유의 문어숙회가 맛있는 이 집은 꽁치철이면 꽁치가 통 마리로 올라앉았고 메밀전병이나 메밀전 노릇하게 구워지는 동안 술잔이 몇 순배는 돌아야 제격이었다. 묘한 끌림이 있어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누군가 메밀집을 외쳤고 사람들은 그곳으로 몰려가곤 했다. 지금도 정말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메밀집을 누군가 떠올리고, 또 그곳에 가면 익숙한 지인을 만나 술잔을 나누는 반가운 동행을 만나기도 한다.
메밀집은 옥천동의 이정표와 같은 집이다. 가끔 그곳에 가 웃고 떠들다가 내 일상의 무탈함을 확인하기도 하는 곳. 메밀집은 서민들의 묵은 김치처럼 오래될수록 생각나는 뭔가를 간직한 맛집이다. 해가 바뀌기 전에 메밀집 한 번 가봐야겠다. 무탈 하러.
강다방 이야기공장은 역앞 육거리 원형교차로에서 중기골목 방향에 마주하고 있다. 강상윤 대표가 윤영하는 이 이야기 공장은 강릉에서만 살 수 있는 책을 구비해 놓은 독립서점이자 기념품 가게이며 편집숍이다
강릉 이주청년이 작지만 알찬 독립서점을 운영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책들이 쌓이고, 강릉을 찾는 여행자들에게 좋은 여행코스를 안내해 드리고, 아울러 추억이 될 만한 좋은 굿즈 상품도 구비하는 일로 내내 바쁘다. 이곳에는 시나미 느리게 가는 편지와 여행자의 펜팔 코너도 있으며 서점을 찾는 모든 이들에게 하나의 문장을 선물하는 꼼꼼한 노력도 하고 있다. 독립서점 운영자들과 함께 하는 책모이 프로그램도 있으며 서점지도도 선물한다.그의 이야기 공장이 보다 진화하고 발전하여 좋은 문화공간이자 아름다운 청년들의 아지트가 되기를 바란다. 아울러 더 좋은 책과 기념품으로 강릉이 빛날 수 있기를 빌어본다
지금은 육거리이지만 과거 역전이 성황일 때 번잡한 사거리였다. 중기골목이 생기고 오거리가 되더니 드디어 화부산을 관통해 강일여고 방향으로 치달을 수 있는 길까지 생겨 육거리가 되었다. KTX 는 2018 동계올림픽의 선물이다. 역이 지하화되면서 오랜 세월 양분되어있던 도시가 통일되듯이 허리를 이었다. 길이 열리고, 사람들이 오고갈 수 있게 되면서 교동 택지나 강일여고 즈음에서도 KTX 타러 걸어서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강릉역 육거리는 이제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