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주동 거리

명주동 거리

전체 거리 1.6km / 도보 약 20분 소요

신라시대 강릉의 옛 지명은 명주였으며 그 명주라는 이름을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있는 동네가 명주동 하나 남았다. 명주동은 그러하기에 선사시대 유적부터 근대문화유산, 그리고 한, 중, 일, 서양의 양식이 고루 혼재되어 있는 문화의 용광로 같은 곳. 그래서 명주동엔 옛 화교학교도, 적산가옥도, 그리고 선교사들이 세운 임당성당도 근대유산으로 남아있기에 골목마다 이야기가, 모퉁이마다 재미난 풍경이 넘쳐나는 거리이다.

명주동 아트 모탱이 명주동 커피 모탱이 성내광장 모탱이

1. 명주동 아트 모탱이

거리 500m / 도보 약 7분 소요

강릉시내 초입으로 명주예술마당부터 강릉대도호부까지의 골목길. 임만혁작가의 벽화거리 사이로 근대유산이 남아있는 집들을 발견할 수 있으며 골목길을 따라 마크라메와 수제 빵집, 수제 청 등을 만드는 곳을 만날 수 있다. 집도, 사람도, 이야기도 모탱이마다 예술로 새겨진 곳. 때로 풍경도 예술이다.

명주동 아트 모탱이

명주동 삼거리

명주동은 명주군의 옛 이름을 가진 유일한 동네이다. 이곳 삼거리는 과거 홍제동을 지나 강릉시가지로 드나드는 길목이었다. 농협 강릉시지부 앞이 버스터미널이던 시절, 가구골목을 통해 서울로 가는 차들이 이 삼거리를 통과해 갔으며 오래도록 강릉사람들에게 택시부광장과 함께 삼거리로 유명했다. 삼거리 바로 앞에는 공제약국이 있었고 옛 시절 김공이 제방을 쌓았다는 구휼의 의미가 있는 공제 삼거리가 있다. 그 자리에 공제 독서실도 있었고 오래된 자전차포가 있었다. 지금도 삼거리식당이 있어 그 시절을 회상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명주동 가운데 길인 명주사랑채와 명주배롱으로 통하는 길은 과거 물길이 흘렀고, 지금은 도로로 덮여 그 오래된 역사를 성벽과 돌담으로만 기억하고 있다. 적산가옥들이 많이 남아 있었으며 과거엔 양조장, 간장공장, 막걸리공장, 제재소 등등이 명주동에 빼곡히 들어차 있었으나 지금은 오래된 골목으로 기억될 뿐이다.

명주예술마당

명주예술마당? 마당인가 하는 분들이 계시겠지만 줄여서 <명주예당>으로 국내 최초의 시민들을 위한 음악전용 연습공간이다. 원래 이곳은 명주동 삼거리에서 들여다보이는 곳에 있는 명주초등학교 자리. 1946년 개교한 오래된 학교는 1995년 학생 수 감소로 폐교하고 명주초등학교는 남대천 건너 아파트촌 많은 곳으로 이전하게 된다. 오랫동안 폐가처럼 비어있던 학교는 2010년대 들어 시민예술공간을 만들기 위한 다양한 논의를 거쳐 시민들이 원하는 공간으로 만들자는 의견이 모아져 집집마다 색소폰, 피아노, 오카리나 등등을 연습하기 어려운 점을 호소하는 분들이 많아 음악연습공간으로 2016년 재탄생하게 된다.

명주예술마당은 본관동 3개 층에 방음시설을 갖춘 개인 연습실, 중규모 연습실, 그리고 오케스트라가 소리를 맞춰 볼 수 있는 대형연습실은 물론 무용 등을 연습할 수 있는 마루연습실, 그리고 연습한 시민들이 발표할 수 있는 100여석 규모의 공연장 까지 갖추고 있다. 물론 실용음악 하는 친구들을 위한 밴드 연습실과 음악 녹음실까지 구비하고 있어 이곳을 이용하시는 분들이 본인 음악을 창작할 수 있는 시설까지 갖추고 있는 곳이다.

오래된 교정은 주차장으로 변모했지만 운동장 끝에 있던 수백 년 느티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섰다. 그 커다란 나무 밑에 모여 공기놀이와 고무줄을 하던 올망졸망 초등학교 친구들은 이제 어른이 되어 그 만한 아이들의 손을 잡고 음악연습을 시키러 오곤 한다. 그렇게 세월은 가고 오는 것. 여행처럼 이 골목을 거닐던 당신은 지금 어디쯤에 있을까요?

명주예술마당

중앙동도시재생현장지원센터

똑똑똑 어블뜨레 마을은 중앙동 도시재생이 사랑하는 마을 브랜드이다. 임영관 삼문인 객사문과 KBS강릉방송국을 옆과 앞에 둔 센터는 예전 한국은행 관사로 쓰던 건물을 리모델링해 주민들이 활용하고 있다. 마을 공동체는 협동조합도 만들었고, 마을해설사들이 골목길따라 해설해주는 프로그램도 있으며, 계절마다 마을축제도 연다. 마을축제는 주민들이 직접 나와 커피도 내리고, 빵도 굽고, 어묵탕도 끓이며 감자전도 부친다. 지글지글, 보글보글 맛있는 향기 가득한 이곳에서 차와 커피, 그리고 음악을 들으며 플리마켓도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삶이 축제이고, 축제가 일상이 되는 신기한 경험을 하고 있다는 이 주민들의 일상을 살짝 여행자의 시선으로 둘러보아도 좋다. 가끔 열리는 마켓에 참여하다 보면 내 삶도 축제가 된다.

중앙동도시재생현장지원센터

마을카페 ‘객사문’

중앙동 주민들이 직접 운영하는 카페가 생겼다. 무려 1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건물에 입주했다. 서까래와 천정은 그때 그 시절 풍경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주민들이 번갈아 돌아가며 당번제로 운영되는 마을 카페는 마을 바리스타들이 직접 커피를 내린다. 그래서 너나없이 같이 어울릴 수 있는 분위기를 연출하곤 한다. 그렇다고 여행자들이 불편하다거나 하는 게 아니다. 여행자들이 그만큼 편안해진다는 것이다. 미숫가루 라떼처럼 마을 방앗간에서 직접 빻아온 것들이 많다. 아울러 주민 중 파티시에가 계시기에 그날 만든 고소한 빵이 나온다. 커피 한 잔에 담백한 빵 한 입 베어 물면 그것이 행복 아니겠는가? 카페 객사문에는 행복을 나르는 제빵사와 바리스타들이 있다.

강릉대도호부

관아, 임영관, 칠사당, 객사문 등 그 안에 있는 여러 이름으로 불리던 강릉의 옛 관청은 강릉대도호부라는 제 이름값을 찾게 된다. 송강 정철 선생의 <관동별곡>에는 ‘강릉대도호부 풍속이 됴을시고’하고 ‘골골마다 효자정문과 글 읽는 소리 넘쳐났다’고 노래하고 있다. 강릉대도호부의 뒤편 임영관은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이 936년 선물한 것으로 이후 마지막 공양왕이 현판을 써 놓아 그 역사적 의미를 더하고 있다. 배흘림기둥 양식으로 신라 말 고려 초 건축미학의 백미로 꼽히는 국보 51호 ‘임영관 삼문’의 배흘림기둥 양식은 부석사 무량수전과 함께 우리 목조건축의 양대 산맥으로 불린다.

칠사당은 관아에서 일곱 가지 정사를 돌보던 곳으로 목조건축의 미학을 집대성해 놓은 듯하다. 서울시의 재개발 붐이 불었을 무렵 우리 한옥을 지킨 파란 눈의 한국인 피터 바톨로뮤 선생이 해마다 한옥건축의 백미를 찾아 이곳을 답사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관아 작은도서관’이 연접해 있으며 강릉 원도심의 중앙에 이처럼 큰 문화재 사적공원을 갖고 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강릉대도호부

2. 명주동 커피 모탱이

거리 800m / 도보 약 10분 소요

명주동 문화마을로 변모하면서 다양한 카페들이 들어서고 있다. 대도호부에서 길 건너 사이길로 <작은공연장 단>과 <명주사랑채>로 이어지는 거리를 따라 봉봉방앗간, 명주배롱, 오월 등 다양한 카페들이 레트로와 감성을 담뿍 담아 놓고 있다. 가구골목을 이어 햇살박물관까지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카페와 수제 요거트, 디저트카페, 선물가게 등등이 들어서며 제3의 진화를 거듭하는 중인 거리.

명주동 커피 모탱이

<카페17>과 <스튜디오 차박>, 그리고 오래된 커피풍경

명주동에 원두 커피문화가 아직 자리잡기 전인 2000년대 중후반 명주동 거리가 아직 문화마을 이름표를 달기 전 이 동네엔 <커피풍경>, 이병학 선생의 <히피커피>, <카페 썬> 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10여 년 전의 그 무렵. <명안 보이차>까지 명주동 문화마을의 초창기를 일군 사람들. <커피풍경>엔 이강일 숭실대 F&B 교수가 이곳에 커피향기를 뿌리고 있었고, 수망로스팅으로 커피를 볶고 핸드드립만 고집하며 커피를 내리던 <히피커피>의 이병학 선생은 그 후로도 제자들을 키워내 마니아층을 형성하기까지 했다. 그 중에 <커피풍경>자리는 간판 리모델링을 거쳐 <카페 17>과 <스튜디오 차박>이라는 이름표를 달았다. 카페와 함께 2층에 자리한 <스튜디오 차박>은 골목여행 사진을 촬영하는 명주동사진관을 표방하고 있으며 전문 포토그래퍼가 웨딩촬영까지 해주는 곳이다.

히피커피시대를 되짚어 볼 수 있는 그 당시를 추억하는 카페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카페 남문동> 정도가 아닐까 싶다.

<카페17>과 <스튜디오 차박>, 그리고 오래된 커피풍경

카페 남문동

임만혁거리 끝단에 대도호부 칠사당으로 접어드는 곳에 자리 잡은 <카페 남문동>은 갤러리다. 카페를 운영하시는 사장님이 원래 상당한 실력의 디자이너이자 아티스트이기에 자주 전시회나 시낭송회를 열어 화가들이나 문인들의 아지트로 통한다. 다른 카페들과 달리 이곳은 실제 화가나 디자이너의 진작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아울러 별도의 모둠방이 마련되어 있어 회의나 작은 모임을 하기에도 적당한 카페이다.

여류작가회 등에서 정기 모임을 갖기도 하며 청년 아티스트들이 공간을 빌려 이곳에서 청년작가 전시회를 열기도 한다. 이처럼 다양한 문화공간들이 있어 명주동이 문화마을이라는 이름값을 하고 있는 것. 오래된 명주동의 향기가 골목 어귀마다 넘쳐나고 있다.

작은 공연장 단

강릉사람들에게는 단오 유전자가 별도로 흐른다고 할 정도로 단오사랑이 유별나다. 그 단오의 ‘단’자를 떼어 ‘단 공연장’을 만들었다. <작은 공연장 단>은 강릉 유일의 공공재 소극장으로 통한다. 작은 연극이나 소규모 하우스콘서트, 시낭송회 등등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 소극장 앞엔 ‘1958년 준공’이라는 근대문화유산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남아 있다. 강릉 최초의 교회 건물이었던 것을 2010년대 들어오면서 강릉시가 매입하여 작은 공연장으로 만든 것이다.

단 공연장은 소규모 공연장이라고 하여 얕볼 일이 아니다. 이곳을 거쳐간 뮤지션들이나 아티스트들이 모두 짱짱한 이름들이기 때문이다. 유명한 기타리스트 함춘호 밴드를 비롯 하림, 유리상자 등의 뮤지션과 팝페라 가수 등등이 이 무대에 섰다.

기획공연과 대관공연 등을 수행하며 강릉의 소극장문화의 홀씨를 뿌리고 있는 덕에 이제는 <작은 공연장 단>의 공연은 고정 관객을 확보하고 있을 정도로 상당한 이름값을 하고 있다. 공연장은 120석 정도의 관람석과 조명, 음향, 무대시설을 모두 갖추고 있어 소규모 공연문화를 즐기려는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작은 공연장 단

파랑달협동조합

파랑달. 이름이 참 예쁘다. 그리고 그 파랑달에 문화의 이름표를 만들려고 저토록 애쓰는 사람들의 마음은 더 예쁘다. 방송작가 권정삼, 디자이너 안현주, 포토그래퍼 김경남 등등. 처음 함께 했던 사람들 중에는 이미 각자의 독자적 브랜드 이름표를 붙인 이들도 있다. 그들은 지금의 <명주배롱>이 커피포트 이름이던 시절 1층을 사무실로 쓰며 명주동과 강릉의 문화 사업 매개자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 냈다. 문화기획, 공정여행, 출판, 문화브랜드 등 다양한 영역을 소화해내고 있는 파랑달은 2018 동계올림픽을 전후로 하여 명주동골목여행과 랜선여행, 한복과 근대 양장 옷 대여 등 다양한 콘텐츠를 담아내고 있다. 협동조합으로 이름을 단지 어느새 5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그간 참 많은 우여곡절도 겪었으며 또한 더 많은 시간과 사람이 함께 했다. 이들의 문화실험이 이제 슬슬 결실을 맺게 되는 걸까? 명주동을 걷는 사람들,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이제는 돌아와 내 앞에선 누이 같은 꽃이 되어가는 느낌이다. 파랑달. 이름을 부를 때마다 달달한 무언가 같이 올라오는 맛깔스런 것이 아로새겨진 이름. 그 이름을 오래도록 읊조리며 살 수 있기를 고대해본다.

파랑달협동조합

가구골목은 여전히 가구 천지

강릉사람들은 다른 곳에 가구점이 아무리 많이 생겨도 여전히 명주동과 남문동 사이 이 골목을 가구골목이라 부른다. 그 만큼 오랜 세월 강릉사람들과 가구살림을 살았던 곳이라는 얘기다. 한국전쟁 이후 이곳 초입에 시외버스 터미널이 있던 시절. 가구골목엔 적산가옥들이 많이 남아 그 곳이 모두 여인숙이나 여관 노릇을 했다. 태백, 정선, 동해, 양양 등지의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하룻밤 자고난 다음 새벽 첫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새로 살림을 나거나 아들딸 시집장가 보낼 적에 모두 이곳 가구골목에 와서 가구를 사고, 맞추고 했단다.

그 시절엔 가구를 지금의 붙박이장처럼 직접 만드는 목공소들이 가구골목 곳곳에 있었다. 큼지막한 목공소가 서넛 있었고 소규모 목공시설을 대부분의 가구점들이 갖추고 있어서 장롱도 짜고, 자개도 붙이고, 서랍장도 만들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전히 이 인근의 오래된 집안엔 상당한 수준의 자개장롱이 안방을 차지하고 있다. 근처에 가구골목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아울러 이 인근에 시청, 군청, 읍사무소, 경찰서, 법원, 한국은행 등등이 모두 모여 있었기에 그곳에 근무하는 임직원들의 집들이 많아 해가 바뀌면 자주 장롱을 들이고 했다는 것이다. 마지막 남은 가구공장은 20여 년 전에 문을 닫았고 지금은 가구골목 초입에 삼진목공소 하나가 남아 그 지난한 세월의 일부를 보여주고 있다.

가구골목은 여전히 가구 천지

햇살박물관

명주동 문화마을 사업의 핵심 거점기지로 만들어진 햇살박물관. 강릉에서는 처음으로 만들어진 생활사박물관이자 마을박물관이다. 공식 명칭은 <명주동마을 햇살박물관>. 햇살이 들어간 이유는 오래된 원도심 마을인 명주동에 햇살을 비춰주자는 의미였다. 다른 하나는 그 건물을 보는 순간 햇살이 너무 환하게 비추는 양지바른 곳이라 햇살처럼 빛나라는 의미였다. 원래 이 건물은 오래도록 <몽블랑>이라는 작은 인쇄소가 있었다. 몽블랑 털보아저씨는 원래 명륜고 후문 교동사거리 쪽에 계셨는데 이주해 이곳에서 터를 잡으셨나보다. 몽블랑의 1990년대 그 시절 인쇄기가 창가에 그대로 자리 잡고 있어 그 때를 이야기해준다.

햇살박물관이 의미 있는 것은 마을 주민 분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만든 생활사박물관이라는 점이다. 문춘희 어머니는 시집 올 때 입고오신 한복을 기증하여 전시중이다. 오래된 단지와 살림, 옛날 흑백텔레비전이나 학창시절 교복까지 전시되어 있다. 특히 시집장가들 때 사진, 자녀들 유년시절 사진이나 졸업사진 등등을 모아 명주동 사람 책을 만들어 전시중이기도 하다. 특히 마을 주민 분들이 모여 마을해설사협동조합을 만들어 지금도 운영 중이다. 그들의 햇살이 마을을 오래도록 따뜻하게 비춰 주리라 믿는다. 마을은 사람이 만든다. 그리고 사람이 사람을 불러 모으고. 그게 사람 사는 세상일게다.

남문칼국수

명주동에 거의 희귀본으로 남아있는 일제시대 건축물. 무려 1939년생인 이 건물은 그 시절 이층 목조주택에 지하로 통하는 은밀한 피난시설까지 여전히 갖고 있는 집. 여기엔 옹심이 칼국수와 강릉 막장을 사용하는 장칼국수가 일품이다. 근대 건축물답게 옆으로 길쭉하게 생긴 이 집은 가운데 주방을 중심으로 양쪽에 사랑채와 안채를 갖춘 그 시대의 건축양식을 따랐다. 아마도 이 일대의 당시 건축물들이 좁은 신작로를 따라 나란히 지어져있었을 터이다. 옆에 있는 이 보다 훨씬 작고 오래된 집도 비슷한 형상을 하고 있다. 남문칼국수는 그 고풍스러움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여전히 미모의 사장님은 국수를 밀어 손칼국수를 하고, 여전히 옹심이를 빚는다. 오래된 장맛만큼이나 구수한 사장님의 손맛은 여전히 지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딱 강릉 상 남자 스타일로 국수를 날라주는 시크한 남성은 이 집 아드님. 무심한 듯 하면서도 싱긋 웃으며 깍두기를 더 챙겨주는 세심함을 갖고 있다. 여름나절 마을길에서 더러 만나면 그 특유의 백만 불짜리 미소를 날리며 지나는 이 집 사람들의 매력은 오래된 집을 지키고 사는 온정이 깃들여져 있어서일 터이다.

옥상에 얹힌 오래 묵힌 장 단지들이 비오는 날이면 들려주는 멜로디처럼 자세히 들으면 들리는 것들이 있다. 자세히 보면 보이는 것들이 있다. 이집 담장 오래된 대문처럼, 장맛처럼 세월을 느긋하게 익어가며 반길 일이다.

창포다리

명주동 골목에서 남문동을 지나 강남동 단오공원으로 향하는 길에 인도교가 하나 놓였다. 걸으면서 즐기는 단오문화 즐기기 사업의 일환으로 2013년 오직 사람을 위한 다리가 놓였다. 자동차나 바이크 종류들은 다닐 수가 없다. 강릉엔 이곳 창포다리와 남대천 끝자락에 바다와 만나는 곳에 위치한 안목의 솔바람다리, 그리고 경포와 강문이 만나는 지점의 솟대다리까지 자동차가 아닌 오직 사람을 위한 다리가 많다.

창포다리는 당연히 단오를 의미하는 그 꽃창포다. 음력 5월 5일. 양기가 가장 넘쳐난다는 5월에 여인들은 창포 삶은 물에 머리를 감으며 무병장수를 기원했다고 한다. 또한 이 시기 창포삶은 물이 머릿결을 곱게 한다고 하여 5월 단오에는 머리를 감는 풍습이 전해 내려오는데 강릉단오제에서는 실제 창포물에 머리를 감아 볼 수 있는 체험행사가 있으니 이 창포다리를 건너 단오장에 들러 진짜 창포 삶은 물에 머리를 감아 볼 일이다.

창포다리

3. 성내광장 모탱이

거리 300km / 도보 약 5분 소요

옛 강릉극장과 동명극장 사이 강릉인들에게 오래도록 택시부광장으로 불리고 있는 원도심 중앙광장. 중앙시장이나 성남시장을 오르내리는 길목이자 사통팔달의 광장이다. 남대천과도 이웃하고 있고 다리 건너 노암, 내곡, 구정 지역 분들과 남문, 홍제, 금학동 등 원도심의 분들이 지금도 애용하고 있는 한의원, 병원, 약국, 은행 등이 금성로 거리를 따라 이어지고 있다.

성내광장 모탱이

성내광장

‘빨간 마후라는 하늘에 사나이. 빨간 마후라를 목에 두르고~’하는 노래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영화로도 만들어져 당대 최고의 흥행을 이끌었던 빨간 마후라. 그 원조가 바로 성내광장이다.

한국전쟁 당시 K-18 비행장이 국내 최초로 강릉에 생겼다. 그리고 처음 우리 공군이 출격하게 되었을 때, 비행사들이 살아서 돌아오기를 기원하며 당시 강릉여고 학생들이 액운을 막아준다는 벽사(辟邪) 의미의 빨간 스카프를 목에 둘러 준 것이 그 기원이다. 그리고 살아 돌아온 공군 조종사들을 위해 대규모 전승축하 퍼레이드를 연 곳도 바로 이곳 성내광장이었다. 이 이야기는 우리 <공군 전쟁사>에도 나올 만큼 유명한 이야기로 당시 빨간 스카프를 직접 매어준 여학생을 훗날 할머니가 되었을 때 만나 뵌 적이 있다. 그 당시의 가슴 벅찬 광경을 생생하게 들려주시는데 결국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셨다.

물론 이곳이 강릉사람들에겐 여전히 ‘택시부광장’으로 불린다. 과거 차량이 많지 않았던 시절. 택시를 타려는 사람들이 모두 이곳에 와야 택시를 탈 수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과거 대규모 군중집회로 대통령 선거연설 등을 하던 곳이 바로 이곳이어서 김대중 대통령도, 김영삼 대통령도 후보시절 모두 이곳에 와서 연설을 했다. 도시의 개방성을 보려면 도심에 그리스의 아고라와 같은 광장이 있는지 살펴보라고 했다. 강릉엔 성내광장이 있다.

성내광장

삼천리자전거

이 동네에 오래된 기억의 하나가 이 삼천리자전거가 아닐까 싶다. 아직 삼천리자전거 이름표를 달고 있는 것이 감사할 일이다. 주인 아저씨는 예나 지금이나 쌩쌩하시다. 날렵한 자전거처럼. 그 시절 자전거는 아이들의 귀한 아이템 중 하나였다. 자전거를 탈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자전거가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었다.

아이들은 자전거를 타고 신 새벽을 헤치고 해돋이를 보러 경포며 안목으로 내 달았다. 경포중학교 언덕마루에서 노암파출소까지 한 달음에 내리달리는 자전거는 때로 파출소를 그대로 들이받고 내동댕이쳐지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임영고개에서 줄달음으로 교동사거리까지 내리달리던 자전거가 가로수를 들이받기 일쑤였다. 그렇게 받힌 아이는 무릎이 까진 바지에 흙을 털고 그대로 절뚝이며 삼천리자전거에 끌고 가 바람빠진 바퀴에 열심히 펌프질을 해 바람을 넣거나 여학생들 앞에서 보기 좋게 넘어져 헤집어진 가슴처럼 구멍 난 바퀴에 솜씨 좋은 아저씨 손에 맡기기도 했다.

삼천리자전거는 딱 그 가운데 길목이라 여럿이 지나며 들르기 좋은 그 시절 최고의 자전거수리 맛집이었다. 나는 아직도 ‘구리스’라고 하는, 체인에 기름칠해 주면 쌩쌩하게 다시 달릴 수 있는 그 시절 마법의 가루같은 기름의 냄새를 기억한다. 그리고 그런 기름밥이 인도 여기저기 떨어져 있음으로 하여 누군가의 교통이 불편하다고 민원이 들기도 했지만 그 기름냄새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 나오는 까까머리 아이들처럼 자전거라는 상징 아이콘으로 우리에게 귀한 사진첩의 한 페이지를 물들여주었다. 우리는 여태껏 새로 자전거를 사야할 때엔 꼭 삼천리자전거를 찾는다. 여전히 사장님은 나를 몰라보고 싱글벙글 웃으시며 ‘공군부대 계시지요?’한다.

옛 강릉극장 – 1990년대 극장을 추억하며

지금 제일은행 맞은편 삼천리자전거 골목에 강릉극장이 있었다. 그리고 택시부광장 옆 노암교 입구에 동명극장이 있었으며 지금은 독립영화관으로 되살린 신영극장, 그리고 중앙시장 끝단 양쪽으로 남대천 방향엔 문화극장이, 임영고개 방향으로는 중앙극장이 있었다. 당시 극장은 청소년들의 유일한 해방구이자 문화 사랑방이었다. <즉은 시인의 사회>, <분노의 역류>나 <사랑과 영혼>,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등등의 멜로물이나 멜랑꼴리한 영화들을 이곳에서 만났다. 지금의 넷 플렉스 따위는 꿈도 못 꾸던 시절이었으니 <일 포스티노>(우편배달부) 같은 좋은 영화를 만나 심야편을 보고 있노라면 저쪽 어디선가 영화광으로 통하는 교수님이나 선배의 실루엣을 확인하고 씨익 웃기도 하고 그랬던 시절이었다.

강릉극장의 짧은 계단을 올라 극장에 들어서면 문화인이 된 듯한 착각과 그런 이들과의 조우가 기분 좋던 치기어린 마음, 그리고 매표소를 지나 매점에서 쥐포를 굽고 팝콘을 하나씩 들고 있던 그 분위기는 다시 만나기 어려운 호시절이었다.

강릉극장 인근에는 신성구 선생을 필두로 한 <극단 사람들>이 생겨나 1980년대부터 90년대로 이어지는 전환기의 시대, 넘쳐나는 아방가르드의 기운을 연극에 쏟는 이들도 많았다. 그런 문화공간들로 예맥아트, 다랑 등의 문화공간이 모두 이 도심권에 자리하고 있었다.

옛 강릉극장 – 1990년대 극장을 추억하며

장서원김밥부터 헤스롤까지

오래된 식당이고 사장님도 그대로인데 시대에 따라 자꾸 간판을 바꾸니까 자꾸 헷갈린다. 장서원 김밥은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절 김밥천국이었다. 맛있는 김밥은 물론이거니와 맛있는 여러 음식들이 맛깔나게 아이들 입맛을 사로잡았다. 오래도록 장서원으로 있다가 어느 날 <해스롤>이란다. 해스롤은 이름에서 느껴지듯 초밥과 일식을 기본으로 하는 듯 하다. 사장님 겸 주방장님이 개발한 메뉴들로 맛은 물론이거니와 가성비 하나는 끝내준다. 여럿이 몰려가 한상 배부르게 먹고 나와도 몇만 원을 넘지 않는다. 또 그 직장인들이나 청년의 호주머니 사정을 걱정해주어서인지 셋트 메뉴까지 있어 더 시키면 그 걸로도 충분하니 더 시키지 말라고 하신다.

음식 인정 넘치는 이집에서는 청량감 맴도는 맛깔스런 메밀소바와 해산물요리, 그리고 초밥 롤 세트를 꼭 맛봐야 한다. 점심에는 자리가 없을 지경이니 미리 예약을 하고 가는 게 좋다. 또한 더러 손님이 좀 한산한 틈을 타 인심좋은 사장님의 서비스메뉴도 맛볼 수 있으니 천천히 음식 본연의 맛을 느껴보시길 권한다. 초밥 한 알에도 우주가 담겨 있을까? 우주는 모르겠지만 낭만 가득한 바다 내음 한 줌은 들어있음을 알겠다. 톡톡 터지는 연어알 초밥에서 느껴지는 생생한 바다의 맛. 강릉은 바다다.

카페 범스-뱅

뱅쇼(Vin Chaud)를 생각나게 하는 이름. 뱅쇼는 파리의 물랑루즈가 자랑하는 따뜻한 와인음료이다. 뱅쇼를 만드는 법은 정말 간단하다. 그냥 평범한 레드 와인 한 병, 그리고 함께 끓여 마시고 싶은 과일(레몬이나 사과같은 과일), 그리고 꿀 조금과 계피 몇 조각을 넣으면 추위든 스트레스든 한 방에 날려버릴 환상적인 뱅쇼가 만들어진다. 범스-뱅은 원래 강릉의 그럴싸한 와인바로 10여년 이상 인기를 끌었다. 그러다가 요 몇 년 사이 와인 보다는 무슨 에베레스트 빙수나 망고빙수, 허니 브레드 등등이 인기다. 그런 음료문화도 트랜드를 타나보다.

강릉단오제를 국제관광민속제로 떠들썩하게 치르던 2004년에 처음 문을 연 범스-뱅은 문화공간이다. 이곳 사장님이 음악과 미술을 좋아해 뮤지션들이나 작가들의 아지트로 통한다. 입구에 전시되어 있는 그림도 사장님이 직접 그린 그림들이다. 자화상도 있고 정물화도 있어서 눈길을 끈다. 특히 자기만의 느낌을 살린 자화상은 색감이나 붓 터치가 예사롭지 않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했던가? 오래된 추억의 사진첩 같은 빈티지한 범스-뱅은 편안함이 여행자의 발길을 붙잡는다. 와인이든, 허니 브레드이든, 혹은 그림이든, 비오는 날의 재즈음악이든 어느 것이라도 좋다. 그 도심의 오래된 골목 어딘가 내 젊은 날의 초상 하나쯤 있어도 그럴듯하지 않겠는가? 이십년 쯤 더 지난 후에 그 골목에 우두커니 서서 더 어린 날의 나를 꼬옥 안아줄 수 있기를.

카페 범스-뱅

춘천1번지 닭갈비

춘천1번지닭갈비는 닭갈비 골목에 오랫동안 터를 잡은 터줏대감이다. 그간 관동닭갈비며 춘천닭갈비 등 1990년대 이곳도 닭갈비 골목으로 대학생들의 사랑을 어지간히 받았던 곳인데 이제는 닭갈비집이 많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그 나마 오래된 집의 1순위로 꼽을 수 있는 곳이 1번지닭갈비. 무엇보다도 철판닭갈비의 감칠맛 도는 맛에 빠져 열심히 드나들 수밖에 없다.

다른 닭갈비와의 차별성을 찾으라면 푸짐한 야채와 함께 닭갈비 본연의 맛에 충실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양념이 알맞게 버무려져 잘 익어갈수록 양념의 맛이 골고루 배어 바닥까지 박박 긁어먹게 된다.

특히 저녁나절엔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많은 청춘들의 사랑을 받는 현지인 맛집. 고소하고도 매콤한 닭갈비의 향이 맛있게 배어 낮에 먹으면 동네방네 소문나게 된다는 사실. 그래도 불사하고 현지인들은 점심에도 간다. 양이 푸짐해 2인분 시켜도 실컷 먹고 밥까지 볶아먹고 나면 뒤 늦은 후회를. 하지만 어쩌랴. 맛있게 먹었으니 오늘은 0칼로리라 우기자. 그러고 나면 오후가 행복해진다는 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