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화 거리

월화 거리

전체 거리 1.4km / 도보 약 17분 소요

무월랑과 연화아씨의 사랑이야기가 천년의 세월을 건너 이곳 거리를 수놓은 곳. 도심을 가로막은 거대한 철뚝길을 들어내고 나니 새롭게 발견되고 만들어진 거리. 천년 후의 사랑꾼이 행복한 웃음 장착, 팔짱 끼고 즐겨 찾는 거리.

월화광장 모탱이 월화낭자 스토리 모탱이

1. 월화광장 모탱이

거리 100m / 도보 약 2분 소요

월화광장은 2018 문화올림픽의 주무대로 사용되던 곳. 신라 화랑들의 별유천지였던 강릉을 세계적인 선수들이 몰려들어 이곳에서 음악과 퍼레이드를 즐겼다. 임당시장과 금학시장이 철길 뚝방을 따라 좁고 길게 늘어서 있던 것이 이제는 청춘의 옷을 갈아있고 오래된 느티나무와 함께 새 역사를 만들어가는 중이다.

월화광장 모탱이

보진당

중앙시장 맞은편으로 큰 은행나무가 있고 그 앞에 보진당(葆眞堂)이라는 옛 기와집이 자리하고 있다. 보진당은 조선 중기 호조참의로 추증된 권사균(權士鈞)이 지은 별당건물. 1867년(고종 4년) 화재로 소실되어 이듬해 중건했다고 한다. 강원도 문화재자료 6호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으며 정면 4칸, 측면 3칸의 별장식 건물에 시판 24개가 있을 정도로 이곳이 봄가을 시문을 지으며 사대부들이 음풍농월하던 곳이라고 하겠다. 특히 보진당은 네 벽이 들어 덮개 방식으로 더위를 식힐 수 있는 누정 방식이라 문인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하겠다. 특히 과거 이 앞으로 강물이 흘렀으니 시인문객들이 즐겨 찾기 좋았을 터이다. 더하여 1,000년이 넘은 옥천동 은행나무가 담장 앞에 자리하여 가을이면 노오란 은행잎이 운치를 더함으로써 시심을 불러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오래도록 평상이 있어 어른들의 유희공간으로 사랑받아왔다.

보진당

옥천동 은행나무

은행나무가 천년이 넘었다는 실감은 가서 팔을 둘러보면 안다. 친구들 몇몇이 팔을 둘러도 남을 만큼 은행나무의 수령이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옥천동 은행나무는 높이 29m에 둘레가 6.5m로 엄청난 규모를 자랑한다. 또한 거기 품고 있는 이야기도 신비롭다. 신라시대 어떤 사냥꾼이 호랑이를 구해준 일이 있는데 어느 날 이 호랑이가 신기한 열매를 물고와 주고 갔단다. 마당 앞에 심었더니 삽시간에 자라나기에 호랑이가 은혜를 갚은 나무라 하여 호행(虎杏) 또는 효행(孝杏)이라 불렀다고 한다. 여하튼 천년이 넘는 세월 강릉을 지켰으니 특별한 의미의 나무임에는 틀림이 없다. 과거에는 이 나무를 돌며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뤄진다고 하여 이곳을 탑돌이 하듯 도는 분들도 많았단다.

옥천동 은행나무

2. 월화낭자 스토리 모탱이

거리 1.3km / 도보 약 15분 소요

월화거리의 끝단에 남대천을 건너는 월화다리가 있다. 그리고 그 다리 아래에 연화낭자의 편지를 물고 전해줬다는 잉어의 전설이 전해지는 ‘서출지’가 있고, 다리 건너편 언덕마루가 연화아씨의 이름을 전한 ‘연화봉’이고 그 품에 ‘월화정’ 정자각이 있어 강릉김씨 시조설화의 이야기를 전한다. 강릉이라는 도시의 창건설화 같은 것. 도시가 화랑과 그 연인의 사랑으로 시작되었다니. 뭐 나름 낭만도시 아니겠는가? (물론 그 보다 오랜 선사시대 유적지도 넘쳐나니 오해하지 말 것.)

월화낭자 스토리 모탱이

월화교

저녁 8시 40분. 그 철길아래 기다리고 있으면 부아앙~ 칙칙폭폭 칙칙폭폭 하며 서울로 가는 마지막 밤기차가 운치 넘치게 달려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남대천변을 걷다가 그 기차를 바라보며 ‘나는 언제쯤 서울 가는 기차를 타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그 밤기차를 부러운 마음가득 바라보곤 했다. 이제는 영영 볼 수 없는 무궁화열차가 도심 철교를 가로지르는 풍경. 지하화를 하면서 생겨난 보물같은 공간이 월화거리와 바로 이 월화교이다. 월화교는 사람이 걸어서 건널 수 있는 다리, 즉 인도교이다. 강남동과 청량동 일대까지 걸어서 건널 수 있는 다리 때문에 사람들은 새벽시장도, 중앙시장과 시내 은행볼일도 걸어서 보는 분들이 늘어났다. 무월랑과 연화아씨가 참 열일 했다. 저 많은 이들이 편안하게 걸어서 남대천 건널 수 있게 했으니.

월화교

잉어편지 서출지 바위

무월랑은 신라 화랑이었고 연화아씨는 강릉여인이었다. 신라화랑이 강릉에 전지훈련 왔다가 이곳 남대천 연못가에서 한 아가씨를 만나 사랑에 빠진 것. 경주로 돌아간 무월랑. 그리고 시집가라고 성화인 연화아씨 집안. 연화낭자는 연못가에 앉아 지난날의 언약을 생각하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데. 그러던 어느 날 잉어가 뛰어올라 그녀가 쓰고 있던 편지를 물고 물속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그 잉어는 마침 무월랑 집안사람 낚시에 잡혀 뱃속에서 편지를 토해내는데. 이 글을 읽은 무월랑 집안에서는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 하여 서둘러 명주로 연락을 넣어 마침내 무월랑과 연화아씨의 사랑이 이어지게 되었다고. 강릉김씨 시조설화인 이 이야기는 강릉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서 편지가 나왔다는 이 서출지(書出地) 바위가 신화 속 그 장소.

잉어편지 서출지 바위

월화정

원래 월화정은 서출지 바위위에 올라앉아 있어서 1930년대까지 강릉보통학교나 농업학교 학생들의 소풍 장소로 애용되었다고. 그러나 1936년 강릉의 큰 물난리인 병자년 포락에 이 월화정이 떠내려가고 오랫동안 잊고 살다가 2000년대 들어와 맞은 편 언덕 위 연화봉 자락에 그 뜻을 기리고자 월화정을 새로이 세웠다.

월화정

연화봉

연화아씨의 설화가 전해 내려오는 이 마을 언덕이 연화아씨 집안이 살았다하여 연화봉으로 명명되었다고. 실제 강 건너 시내에는 1990년대까지 월화예식장, 월화사진관, 월화스튜디오 등등 강릉김씨종친회에서 운영하는 월화 관련 사업체들이 많았고 이곳에서 강릉김씨들은 그들의 시조설화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곤 했다.

연화봉은 실제 지형이 연꽃의 봉오리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하여 풍수지리상 명당에 해당해 강릉의 초창기 아파트인 금모래아파트 등등이 이곳에 지어졌다.

연화봉